이병도는 왜, 금서룡과 불화가 있었으며
조선사편수회에서 왜 보수도 받지않고 일했을까?
이어령의 7촌 이병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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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도
''우리의 최고 정신은 개인이 국가나 민족을 떠나 존재의 의의가 없고 항상 국가와 민족의 통일 발전 가운데 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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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사범학교부속보통학교와 보광학교, 중동학교,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 법과를 졸업하고 와세다대학에서 사학 및 사회학을 전공하였다.
그는 처음에 서양사를 전공하려 했으나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 1873~1961)[16], 요시다 도고(吉田東伍, 1864~1918)의 영향으로 동양사, 특히 한국사로 방향을 틀었다. 이때 그를 지도한 교수는 일본 실증사학의 대부 쓰다 소키치였는데, 문헌 비판과 언어학적 고증을 중시하는 쓰다 소키치의 태도는 이병도에게도 그대로 전승되었다. 이외에 도쿄대학에 있었던 사학자 이케우치 히로시(池內宏, 1878~1952)에게도 자주 가르침을 청하러 간 것은 유명한 일인데 이병도 본인은 이때의 일을 회고하면서 두 학자의 지도를 받을 수 있었음을 자랑스럽게 여겼다고 한다. 그의 졸업 논문은 고구려의 對 수, 당 전쟁의 성격에 대한 것이었으며 학위를 마친 뒤에는 조선으로 돌아와 중앙고등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 후 조선총독부 산하 기관 조선사편수회의 사업 중 하나였던 《조선사》 편찬에 참가하여 수사관보로 재직했는데 당시 수사관이었던 이마니시 류(今西龍, 한자 독음으로 금서룡)와의 불화로 사임하고 보수가 없는 촉탁으로서 조선사 편찬 사업 종료까지 일하였다. 이후 이병도가 한국 고대사학계의 대가가 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조선사》 편찬 사업에 참가하면서 각종 사료에 손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마니시 류 (금서룡)
그는 누구인가
1903년 도쿄 제국 대학을 졸업한 후 1906년부터 경주 등에서 고고학 조사를 하였다. 1913년 9월 조선총독부의 고적조사 때 평안남도 룡강군에서 세키노 다다시와 함께 점제현신사비(秥蟬縣神祠碑)를 발견하였다. 같은 해 교토제국대학의 강사가 되었고, 1916년에는 조교수가 되었다. 북경 유학 후 1926년에는 서울대학교의 전신인 경성제국대학과 교토제국대학의 겸임교수가 되었다. 1925년부터 1932년까지 조선 총독부 조선사 편수회의 회원이었고, 일본의 덴리 대학(天理大學)에는 금서룡문고(今西龍文庫)가 있다.
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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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檀君考》, 1929년 (단군고)
《滿洲語のはなし》, 1931년 (만주어)
《新羅史研究》, 近沢書店, 1933년 (신라사 연구)
《百済史研究》, 近沢書店, 1934년 (백제사 연구)
《朝鮮史の栞》, 近沢書店, 1935년 (조선사의 간:고칠간)
《朝鮮古史の研究》, 近沢書店, 1937년 (조선고사 연구)
《高麗史硏究》, 近澤書店, 1944년 (고려사 연구)
번역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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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사 연구》, 이부오 옮김, 서경문화사, 2008
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B%A7%88%EB%8B%88%EC%8B%9C_%EB%A5%98
이마니시 류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마니시 류今西龍로마자 표기Imanishi Ryu출생1875년 8월 15일기후현사망1932년 5월 20일성별남성국적일본경력조선사편수회직업사학자 이마니시 류(今西龍; 금서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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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마니시 류
이마니시 류( )는 식민사학자이다. 한국 한자음 으로 금서룡이라고도 부른다. 생애 1875년에 출생하였으며,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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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단은 너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