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관유적도첩 (北關遺蹟圖帖)
고려 예종 代부터 선조 代까지 북관, 즉 함경도에서
용맹과 지략으로 무공을 세운 인물들의 행적 또는 일화를 모아 그림으로 그리고
그 내용을 글로 설명해 놓은 '역사고사(歷史故事)화첩'이다.
아마 이들의 본받을 만한 활약상을 귀감으로 삼기 위해 제작하였을 것이다.
고려대학교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내용은 총 여덟 장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탁경입비(拓境立碑), 야연사준(夜宴射樽), 야전부시(夜戰賦詩), 출기파적(出奇破賊), 등림영회(登臨詠懷), 일전해위(一箭解圍), 수책거적(守柵拒敵), 창의토왜(倡義討倭)의 여덟 장면이다.

임진왜란 당시 신립(申砬) 장군의 용맹함을 기리는 '수책거적(守柵拒敵)’에 관한 기록과 그림입니다.
宣祖朝 下三水延察使 申砬 新設屯田于 慶源多山 麗戸 李舜臣 掌其事 至秋收之際 藩胡 諸首與 漠露 不知個 箇 砬 緊嚴兵 趨其 堅守 故 獨有農民在野 虜其 突出光 慶其 兵乘圍木柵 擧兵大掠 時柵中將士 皆出場 躍餘者 無我將不能支 耆長 己尼應个 絶壕而入 將敵 騎柵 自 柵中一箭 射倒賊 後退是 舜臣 申砬 廷 擊奪 運 養民
1. 한자 음 (독음)
수책거적
선조조 하 삼수 연찰사 신립 신설둔전 우 경원 다산 여호
이순신 장 기 사 지 추수지제 번호 도저 여한로 부지 개
리 립 긴엄 병 추 기 견수 고 독 유 농민 재 야 호 기 돌출 광
경 기 병 승 위 국 목 책 수 병 대 약 시 책 중 장 사 개 출 가 도 예 자
무 아 장 불 능 지 고 장 기 니 응 가 궐 호 이 입 장 적 기 책 자
책 중 일 전 사 도 적 후 퇴 시 선거 신 립 개 격 탈 운 양 민
2. 해석 (뜻풀이)
목책을 지키며 적을 막아내다 (수책거적)
선조 시대에, 삼수 연찰사 신립이 경원 다산(多山) 지역에 새로이 둔전을 설치했는데, 이때 이순신이 그 일을 맡아 다스렸다.
가을걷이 때가 되자 번호(여진족)들이 한겨울 추위를 틈타 대거 침입했는데, 그 숫자를 다 알 수 없을 정도였다.
신립이 엄하게 병사들을 단속하며 굳게 지켰으나, 오직 농민들만이 들판에 남아 있었다.
오랑캐들이 갑자기 돌출하여 광경(廣慶) 지역을 습격하자, 기병들이 기세를 타고 나무 목책(울타리)을 에워쌌다.
이때 목책 안의 장사들이 모두 나가 싸우려 했으나 활을 쏘는 솜씨가 예리하고 사나워 우리 군사들이 능히 지탱할 수 없었다.
이에 장수 기니응가(機尼應个)가 해자(성 밖의 도랑)를 뛰어넘어 들어오려 하자, 목책 안에서 화살 한 대를 쏘아 적을 거꾸러뜨렸다.
적들이 겁을 먹고 후퇴하자, 신립이 군사를 이끌고 추격하여 빼앗겼던 양민들을 모두 되찾아왔다.
(참고: 고문서 특성상 일부 글자가 마모되거나 초서체로 쓰여 있어 맥락에 따라 해석되었습니다.)
이 기록은 신립 장군과 이순신 장군이 함께 북방을 지키던 시절의 귀중한 일화를 담고 있다.
척경입비

拓境立碑
高麗 睿宗朝 命守司徒 中書侍郎 平章事 尹瓘 為
行營大元帥 知樞密院事 翰林學士 承旨 吳延寵 為 副
元帥 發兵十七萬 鋪二十萬 擊逐女真 拓地 新築六城 置
咸福 雄 英州 吉 及 公嶮鎮 遂立碑于 先春嶺 以為界嶺
今在 鍾城 直北七百里 碑面有書 為胡人 剝去 後有人掘其
根 有高麗之境 四字
척경입비
고려 예종조명 수사공 시중 중서시랑 평장사 윤관 위
행영대원수 지추밀원사 한림학사 승지 오연총 위 부
元帥(원수) 발병 십칠만 호 이십만 격축여진 척지 신축육성 치
함복 웅 영주 길급공검진 수립비 우 선춘령 이위계암
금재 종성 직북 칠백리 비면유서위 호인 박거 후 유인굴기
근유 고려지경 사자
2. 현대어 해석 (뜻풀이)
경계를 넓히고 비석을 세우다 (척경입비)
고려 예종 때, 임금의 명을 받아 수사공 시중 중서시랑 평장사 윤관을 행영대원수로 삼고, 지추밀원사 한림학사 승지 오연총을 부원수로 삼았다.
원수가 군사 17만 명(부 가구수 20만)을 발동하여 여진족을 격퇴하여 쫓아내고, 땅을 넓혀 새롭게 6성(여섯 성)을 쌓았다.
함주, 복주, 웅주, 영주, 길주 및 공검진을 설치하고 마침내 선춘령(先春嶺)에 비석을 세워 경계로 삼았다.
그 비석은 지금의 종성(鍾城) 바로 북쪽 700리 되는 곳에 있다. 비석 면에는 글씨가 있었으나 오랑캐(여진족)가 깎아버렸고, 나중에 사람들이 비석을 파냈는데 그 뿌리에 '고려지경(高麗之境, 고려의 경계)'이라는 네 글자가 있었다.


夜宴射樽
我 世宗朝 都巡問察理使 金宗瑞 既設六鎮 專尚威極 以媚
獷俗 日置酒 張樂 燕飮極豐 禍裨之前 皆供一牛 頭吏民苦之
或言其 不可 宗瑞曰 風沙絶塞 將士飢苦 吾不約始之後 必無終
一日夜宴 有飛矢中酒樽 左右驚擾 宗瑞自若 人請其故 宗瑞
笑曰 蕃人試我耳 何能為我 請捕之 曰 走已遠矣 捕之何得 乃
極飲終宴
세종 때, 명장 김종서(金宗瑞) 장군과 관련된 일화인 ‘야연사준(夜宴射樽)’에 관한 기록이다.
밤 잔치 중에 화살이 술잔을 맞혔음에도 동요하지 않았던 장군의 담력을 보여주는 이야기다.
1. 한자 음
야연사준
아 세종조 도순문찰리사 김종서 설육진 전상 위무
광속 일치주 장악 연음 극풍 가비지전 개공일우리 민고지
혹언기 불가 종서왈 풍사 절색 장사기고 오역약시지후 필무종
일야연 유비시 중주준 좌우경요 종서자약 인청기이 종서
사왈 여인 시아 이 하능 위아 청 포지 왈 주이 원의 포지 하득 내
극음 종연
2. 해석 (뜻풀이)
밤 잔치 중에 술잔을 쏘다 (야연사준)
우리 세종조에 도순문찰리사 김종서가 육진(六鎭)을 설치할 때, 오로지 위엄과 선심으로 어루만지는 것을 숭상하였다.
변방의 풍속에 날마다 술자리를 베풀고 음악을 베풀어 잔치하며 마시기를 매우 풍성하게 하니, 가시나무 울타리 앞에는 모두 소 한 마리씩을 바쳤다. 이에 아전과 백성들이 고통스러워했다.
혹자가 그 불가함을 말하자, 종서가 말하기를 "바람 모래와 끊어질 듯한 추위에 장병들이 굶주리고 고생하니, 나 또한 이와 같이 대접한 후에야 반드시 마침내 (마음을) 얻을 것이다"라고 했다.
어느 날 밤 잔치를 하는데, 날아온 화살이 술잔을 정통으로 맞혔다. 좌우에 있던 사람들이 놀라 동요하였으나, 종서는 자약(태연자약)하였다.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물으니, 종서가 웃으며 말하기를 "여진 사람이 나를 시험하는 것일 뿐이니, 어찌 능히 나를 위해(危害)하겠는가?"라고 하였다.
(범인을) 잡기를 청하자, 말하기를 "달아난 지 이미 멀었으니 잡아서 무엇하겠는가?"라고 하고는, 마침내 잔치가 끝날 때까지 마음껏 마셨다.

야전부시

세조 때, 신숙주 장군의 일화를 담은 '야전부시(夜戰賦詩)'이다.
신숙주 장군의 야간 전투 중 시 작법
夜戰賦詩
世祖朝 六鎮 藩胡 反側 命 申叔舟 為元帥 往 征之 道 深入
擊破之 虜乘夜來襲 營中 喧呼 應戰 叔舟 堅卧 不動 召
幕僚 口占一絶 曰 虜中霜落 塞垣寒 鐵馬縱橫 百里間 夜戰
未休 天欲曉 卧看星斗 正闌干 將士觀其 晏閑 故 不擾
1. 한자 음 (독음)
야전부시
세조조 육진 번호 반측 명 신숙주 위 원수 왕 정지 도 깊입
격파지 노 승야래 습 영중 훤호 응전 숙주 견와 부동 소
막료 구점 일절 왈 노중 상락 한 담한 철마 종횡 백리간 야전
미휴 천욕효 화간 성두 정란간 장사 관 기 안한 고 불요
2. 해석 (뜻풀이)
밤의 전투 중에 시를 짓다 (야전부시)
세조 때, 육진의 번호(여진족)가 배반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신숙주를 원수로 명하여 가서 정벌하게 하니 (적진) 깊숙이 들어갔다.
적들을 격파하자 오랑캐들이 그 기세를 타고 밤에 몰래 습격해 왔으며, 진영 안은 응전하는 소리로 시끄럽고 소란스러웠으나 신숙주는 굳게 누워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는 막료를 불러 한 절구의 시를 입으로 부르니 다음과 같았다.
"진영 가운데 서리는 떨어지고 변방의 담장은 찬데, 철마는 백리 사이를 종횡으로 누비네. 밤의 전투는 아직 쉬지 않고 하늘은 밝아오려 하는데, 누워서 별자리를 보니 은하수가 난간에 비꼈구나."
장병들이 그의 얼굴빛이 평안하고 한가로움을 보고는, 이 때문에 동요하지 않았다.
3. 주요 요약
이 기록은 신숙주 장군이 전쟁터에서 보여준 비범한 담력을 다루고 있습니다. 갑작스러운 야간 습격으로 군사들이 혼란에 빠질 수 있는 상황에서, 태연하게 시를 짓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군사들을 안심시키고 승리로 이끌었다는 일화입니다.
두 장군(김종서, 신숙주) 모두 위기 상황에서 '부동(不動)'과 '자약(自若)'의 태도로 군대를 통솔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출기파적 (出奇破賊)
이시애의 난 당시 관군의 기지

출기파적 (出奇破賊)
이시애의 난 당시 관군의 기지
[한자 원문]
出奇破賊
世祖朝 丁亥 吉州人 李施愛 據州以叛 道內列郡邑 爭應之 朝廷遣魚有沼 討之 大戰于 洪原 又戰于 𡑮靑 又戰于 蔓嶺 賊乘高據險 矢下如雨 我軍不得上 有沼 潜以小舟 載精兵 著靑衣 與草木色無別 由海由攀木 緣崖 繞出上峯 俯視賊背 鼓噪 賊大驚 崩下之軍 乘勢 蟻附以上 賊不能支 遂潰
[독음]
출기파적
세조조 정해 길주인 이시애 거주이반 도내열군읍 쟁응지 조정견어유소 토지 대전우 홍원 우전우 돌청 우전우 만령 적승고거험 시하여우 아군부득상 유소 잠이소주 재정병 저청의 여초목색무별 유해유반목 연애 요출상봉 부시적배 고조 적대경 붕하지군 승세 의부이상 적불능지 수궤
[해석]
세조 정해년(1467년), 길주 사람 이시애가 반란을 일으키자 조정에서 어유소를 보내 토벌했다. 홍원, 돌청, 만령에서 대전투가 벌어졌는데, 적들이 높은 곳과 험한 지형을 차지하고 화살을 비처럼 퍼부어 아군이 올라가지 못했다. 이에 어유소가 몰래 작은 배에 정예병을 태우고 푸른 옷(청의)을 입혀 풀과 나무색처럼 보이게 한 뒤, 바다에서 나무를 타고 절벽을 기어올라가 적의 등 뒤 봉우리에 나타났다. 아군이 북을 치며 함성을 지르자 적들이 크게 놀라 무너졌고, 기세를 몰아 적을 완전히 격퇴했다.

등임영회

등임영회 (登臨詠懷) - 남이 장군
남이 장군의 용맹함과 백두산에서 읊은 시
한자 원문:
登臨詠懷 /
南怡 宜城尉之子也 生於綺紈而 驍勇絶倫 年纔弱冠 征徒李施愛 先登力戰 榮功第一 等纔報捷 皇朝有夾攻建州三衛 野人之命 朝廷使怡 導四軍赴之 直到巢穴 斬馘無筭 掃蕩而還 登白頭山 作詩曰 白頭山石磨刀盡 豆滿江波飮馬無 男兒二十不平國 後世誰稱大丈夫
독음: 등임영회 /
남이 의성위지자야 생어기환이 효용절륜 연재약관 정도이시애 선등역전 영공제일 등재보첩 황조유협공건주삼위 야인지명 조정사이 도사군부지 직도소혈 참괵무산 소탕이환 등백두산 작시왈 백두산석마도진 두만강파음마무 남아이십불평국 후세수칭대장부
해석: 남이는 의성위의 아들이다. 귀하게 태어났으나 용맹함이 뛰어났다. 갓 스무 살에 이시애를 정벌할 때 앞장서 싸워 공훈 1등에 올랐다. 승전보를 올리자마자 명나라의 건주야인 협공 요청이 있어 남이가 군대를 이끌고 나갔다. 적의 소굴에 직도하여 수많은 적을 베고 소탕한 뒤 돌아오는 길에 백두산에 올라 시를 지었다. "백두산 돌은 칼을 갈아 다하고, 두만강 물은 말에게 먹여 없애리. 사나이 스무 살에 나라를 평정하지 못하면, 후세에 누가 대장부라 칭하리오."

일전해위 一箭解圍

임진왜란 당시 선조의 부름을 받고 한양으로 진격하던 신립 장군의 기개를 묘사한 ‘일전해위(一箭解圍)’에 관한 기록입니다.
이로써 요청하신 모든 고문서 이미지의 한자 원문, 독음, 해석 정리가 완료되었다.
1. 한자 원문/ 음 (독음)
一箭解圍
宣祖 癸未春 賊胡萬餘騎 來圍訓戎鎭 撤長城門 作葛 羹
捄 毀城 中矢盡 力竭 垂 亟 福 穏城府使 申砬 聞變 從間道 馳
來 直突其圍 急擊之 賊胡有知砬面者 見其快射 魁首一矢
而 斃 驚回穏城 令公來也 即揮弓 退北城中 知外救至 開
門夾擊 乘勝直擣 盡蕩 窮廬
일전해위
선조 계미춘 적호 만여 기 래위 훈융진 철 장성문 작갈행
교 준성 중시진 역갈 수 가 복령성부사 신립 문 변 종 간도 치
래 직 돌 기 위 급 격지 적호 유 지 신 면 자 견 기 쾌사 괴 수 일 시
이 斃(폐) 경 회 온 성 령 공 래 야 즉 휘 궁 퇴 북 성 중 지 외 구 지 지 개
문 협 격 승 등 직 도 도 진 탕 번 노
2. 해석 (뜻풀이)
화살 한 대로 포위를 풀다 (일전해위)
선조 계미년(1583년) 봄, 오랑캐 만여 기병이 밀려와 훈융진을 포위했다. 아군은 장성의 문을 철거하여 땔나무로 삼아 국을 끓여 먹을 정도로 상황이 절박했다.
성이 함락되기 직전이었고 화살도 다 떨어져 힘이 다했을 때, 당시 온성부사였던 신립이 변보를 듣고는 사잇길을 통해 달려왔다.
신립은 곧장 적의 포위망을 뚫고 돌격하여 급히 격퇴했다. 적들 중에는 신립의 얼굴을 아는 자가 있었는데, 그가 신립의 쾌활한 사격 솜씨를 보고는 우두머리에게 보고하려 했으나 신립이 쏜 화살 한 대에 맞아 즉사했다.
적들이 겁을 먹고 온성 방면으로 후퇴하자, 신립이 즉시 활을 휘두르며 북성 안팎의 구원병들과 합세하여 성문을 열고 협공하였다.
승세를 타고 적의 소굴까지 직도하여 번호(여진족)들의 거처를 완전히 소탕하였다.



최영년의《해동죽지(海東竹枝)에 실린 인물들의 일화입니다. 첫 번째는 이미 설명해 드린 김종서 장군의 이야기이고, 두 번째는 임진왜란 당시의 명장 정언신(鄭彦信)과 '이순신(李舜臣)'의 일화를 담고 있습니다.
두 번째 이미지(수책거적)를 중심으로 독음과 해석을 정리해 드립니다.
1. 두 번째 이미지: 守柵拒敵 (수책거적)
[원문 및 독음]
守柵拒敵 (수책거적): 목책을 지키며 적을 막아내다.
宣祖朝, 丁亥巡察使鄭彦信, 設屯田于鹿屯島, 令造山萬戶李舜臣掌其事.
(선조조, 정해순찰사정언신, 설둔전우록둔도, 영조산만호이순신장기사.)
至秋收穫之際, 藩胡諸酋與謀, 乘亏知介, 亭嘯聚藏兵楸島.
(지추수확지제, 번호제추여모, 승휴지개, 정소취장병추도.)
見守護孤弱, 農民布一野, 擧衆突入.
(견수호고약, 농민포일야, 거중돌입.)
先使騎兵來圍木柵.
(선사기병래위목책.)
縱兵大掠, 時柵中將士皆出場, 頭餘餘者無幾.
(종병대략, 시책중장사개출장, 두여여자무기.)
將不能支, 吾首長「아니」, 應개「도랑」而入.
(장불능지, 오수장 「아니」, 응개 「도랑」 이입.)
將欲踰柵, 自柵中一箭射倒, 賊徒退走.
(장욕유책, 자책중일전사도, 적도퇴주.)
舜臣聞, 柵追擊奪還農民.
(이순신문, 책추격탈환농민.)
[구글 해석]
선조 조, 정해년(1587년), 순찰사 정언신이 녹둔도에 둔전을 설치하고, 조산만호 이순신에게 그 일을 맡겼습니다. 가을 수확 때가 되자, 오랑캐 추장들이 모의하여 틈을 타서 추도에 병사를 몰래 숨겨두었습니다. 수비가 약하고 농민들이 들판에 퍼져 있는 것을 보고 무리를 이끌고 돌입했습니다. 먼저 기병을 보내 목책을 포위하고 크게 약탈했습니다. 당시 목책 안의 장수와 병사들은 모두 들판에 나가 남은 자가 거의 없었습니다. 버티기 힘든 상황에서 적의 우두머리 '아니'가 도랑을 건너 들어와 목책을 넘으려 하자, 목책 안에서 화살 한 대가 날아와 그를 쏘아 거꾸러뜨렸고 적들이 도망쳤습니다. 이순신이 소식을 듣고 추격하여 사로잡힌 농민들을 되찾아왔습니다.


倡義討倭 (창의토왜)
임진왜란 당시 함경도에서 의병을 일으켜 왜군과 반역자를 토벌한 정문부(鄭文孚) 장군의 활약상을 담고 있습니다.
[원문 및 독음]
倡義討倭 (창의토왜):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토벌하다.
宣祖壬辰倭賊長驅, 八道內叛民爭縛官吏以與賊.
(선조임진왜적장구, 팔도내반민쟁박관리이여적.)
鏡城寺奴鞠世必受倭署官, 聲勢尤張.
(경성사노국세필수왜서관, 성세우장.)
評事鄭文孚, 隔賊中脫身逃走至魚郞里李鵬壽家.
(평사정문부, 격적중탈신탈주지어랑리이붕수가.)
鵬壽與崔配天·池達源等, 推文孚爲倡義大將.
(붕수여최배천·지달원등, 추문부위창의대대장.)
彌召散亡得三百餘人, 至府城誘殺世必.
(미소산망득삼백여인, 지부성유살세필.)
引兵入城, 乘倭賊掠至城南, 文孚聞門擊走之.
(인병입성, 승왜적략지성남, 문부문문격주지.)
建大將旗于南門樓, 正位而坐.
(건대장기우남문루, 정위이좌.)
諸將官皆入鞠躬行禮, 世必繼入使姜文佑等執之.
(제장관개입국궁행례, 세필계입사강문우등집지.)
並其黨十餘人, 數其罪斬之, 懸首彌令.
(병기당십여인, 수기죄참지, 현수미령.)
於是軍聲遂震.
(어시군성수진.)
[해석]
선조 임진년(1592년) 왜적이 거침없이 쳐들어오자, 팔도의 반역하는 백성들이 다투어 관리를 묶어 적에게 넘겨주었습니다. 경성의 종이었던 국세필이 왜적에게 관직을 받고 그 기세가 더욱 당당했습니다. 평사 정문부가 적들 사이를 뚫고 탈출하여 이붕수의 집으로 도망쳤습니다. 이붕수, 최배천, 지달원 등이 정문부를 추대하여 창의대장으로 삼았습니다. 흩어진 사람들을 불러 모아 300여 명을 얻었고, 부성(府城)에 이르러 국세필을 유인하여 죽였습니다. 군사를 이끌고 성에 들어가 왜적이 남문까지 약탈하러 온 것을 듣고 정문부가 문을 열고 나가 격퇴했습니다. 남문루에 대장기를 세우고 바르게 앉아 있으니, 모든 장수와 관리가 들어와 몸을 굽혀 예의를 표했습니다. 국세필 일당 10여 명의 죄를 세어 참수하고 머리를 매달아 명령을 내리니, 이로써 군대의 명성이 크게 떨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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