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그림은 《평번득승도(平番得勝圖)》
12폭의 기록화 중 하나
軍門固原發兵(군문고원발병)
군문 : 성벽을 굳건히 하고 수많은 병사를 정비
군대를 파병하기 전, 군대의 태세를 점검하고 군율을 세우는 장면
1592년 '명조' 영하(寧夏)에서 일어난 반란(보바이의 난)을 진압한 과정을 그린 12폭의 기록화 중 하나

지휘관이 앉아있는 모습이 보인다.
조선 정2품 이상의 관복을 입은 사람이 있고.
장수들이 무릎을 꿇고 보고하고 있는 모습이 담겨있다.
좌, 우측으로 조선의 내관들 모습이 보인다. 상투를 틀어 관모가 위로 볼록한 게 보인다.
또한 뒤로 일원오봉도 그림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상감마마이신 임금(선조)의 명을 받들어 전하는 장면.
그걸 어떻게 증명 하는지 선조 실록의 기록을 통해 알린다.(아래)
영하에서 일어난 반란의 여러기록들.
https://sillok.history.go.kr/search/searchResultList.do
선조실록31권, 선조 25년 10월 6일 임진 2번째기사 1592년
공조 판서 한응인이 아뢰었다.
"오늘 낙 참장(駱參將)이 강을 건너오기에 소신이 나아가 맞이해서 숙소까지 인도하고서는 사기(師期)가 언제쯤인지 물었더니 ‘영하(寧夏)의 적도 가 이미 탕평되었으니 사세가 급하면 여기에 있는 군사를 영솔하고 갈 것은 물론 양 총병(楊總兵)에게 알리면 또한 탕참(湯站) 등지의 군사를 출발시킬 것이다. 그리고 저들 왜적이 이곳으로 올 리도 없고 대군은 머지 않아 도착할 것이다. 송 시랑은 26일에 사조(辭朝)하였으니 출발이 더디다 하더라도 20일이면 요동에 도착하게 될 것이다. 시랑이 나오면 양 총병 자신이 군사들의 식량 준비를 맞게 되어 있어 은냥(銀兩)으로 밥값을 지불할 것이니 하정미(下程米) 를 보내지 않아도 될 것이다. 조금도 폐를 끼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오늘은 관(官)에서 지공(支供)하였는데 숙사(宿舍)에 솥이며 사기그릇 등의 물건이 없어 간신히 찾아 주었습니다."
○工曹判書韓應寅啓曰: "今日駱參將渡江, 小臣往迎, 導至寓舍, 問師期遲速, 則云: ‘靈夏之賊, 旣以蕩平, 事若急, 則當率在此之軍, 而報於楊揔兵, 則亦當發湯站等軍。 且賊無來此之理, 而大軍近當來到。 宋侍郞, 二十六日辭朝, 雖云遲出, 二十日當到遼東。 侍郞來, 則楊揔兵自當辦食軍士, 可以銀兩供食, 下程米亦可不送。 少無貽弊。’ 云。 今日則自官支供, 寓舍無鼎釜沙器等物, 艱難覓給。"

영하(靈夏)를 공격할 때...
상세하게 논하며 임금과 함께 신하들이 이야기 하는 장면이 나와있다.
https://sillok.history.go.kr/id/kna_12512023_003
조선왕조실록
○引見左議政尹斗壽, 行禮曹判書尹根壽, 右贊成崔滉, 工曹判書韓應寅, 兵曹判書李恒福, 戶曹判書李誠中, 吏曹判書李山甫, 西川君 鄭崐壽, 判尹李德馨, 行吏曹參判具思孟, 刑曹參判李希得, 右
sillok.history.go.kr
우리 나라에 공이 있는 석성과 이여송의 사당을 평양에 지어 제사지내다
이여송(李如松)은 용모가 걸출하고 국량(局量)이 넓고 컸다. 군사를 움직이고 진을 칠 때 군사를 온당하게 검속하였으므로 그가 지나는 곳마다 모두 편하게 여겼다. 영하(寧夏)에서 승첩(勝捷)을 거뒀을 때 공을 사양하여 봉작을 받지 않았는데, 평양(平壤)을 격파하고 난 뒤에 승진하여 태자 태보 좌도독(太子太保左都督)이 되었다. 이여송이 우리 나라에 올 때, 그 아버지인 영원백(寧遠伯) 이성량(李成樑)이 추후에 글을 주기를,
"조선은 바로 우리 선조의 고향이니, 너는 힘쓰라."
○李如松容貌魁傑, 宇量寬洪。 行軍臨陣, 鈐束得宜, 所過皆便之。 寧夏之捷, 讓功不封, 及破平壤, 陞爲太子太保左都督。 如松之東(萊) , 父寧遠伯 成樑追與書: "朝鮮乃吾先祖鄕, 汝其勉之
분명히 '이여송'이 영하(寧夏)에서 승첩(勝捷)을 거뒀다고 나와있다.
또한 이여송의 아버지 이성량은 조선은 바로 우리 선조의 고향이니, 힘쓰라 했다.
영하의 난을 제압한 인물은 '이여송'이며 조선인이라고 분명히 적혀있다.


자, 이래도 軍門固原發兵(군문고원발병)도에서 보이는 군대의 태세를 점검하고 군율을 세우고 있는 대신이 우리의 관료가 아닌가?
또 아래를 보자.
臣竊謂陛下, 向者嚴譴學曾, 故寧夏奏蕩平之績,
신의 생각으로는 폐하가 지난날 학증을 엄중히 견책하였기 때문에 영하(寧夏)가 평정된 공적을 이루었고,
https://sillok.history.go.kr/id/kna_12706002_004
영하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는 일.
선조때 논하고 처리한 문제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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